지난 주일 오전에 원상준 목사님의 ‘고통’을 , 오후에 추길호 목사님의 ‘기쁨’을 주제로 각기 말씀을 들었다. 오늘은 ‘고통중의 기쁨’ 이라는 주제로 들어가자. 사실 고통의 세상 속에 고통보다 기쁨이 앞선다. 창조 후에“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의 하나님의 기쁨이 먼저 나왔으며, 첫 인간의 타락으로 땀흘림과 가시덤풀의 고통이 뒤따른다. 그러나 가죽옷의 수치가림과 여인 후손의 첫 복음 예언으로 말미암아 고통속에서도 기쁨을 누리게 되었다.
모든 피조물(=동식물) 조차도 탄식하지만 주님의 다시 오심에 유일한 소망(=기쁨)을 두고
있다. 더우기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자들(=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성도들)은 고통중에서도 기뻐한다. 왜냐하면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기 때문이다. 고통과 기쁨이 범벅이 된 나그네 길에서 기쁨의 감사가 51% 이상, 고통의 한숨이 49% 이하의 삶이 되도록 더욱 주님을 바라보자. Joy Killers를 삶에서 도려내자.
내재하는 죄는 Joy Killer이다. 성도된 우리는 이미 법적으로 예수님 안에서 의인된 자들이다. 그러나 여전히 더러운 죄악들이 한쪽 편에 자리잡고 있기에 죄있는 의인들이다. 그러기에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라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여야 기쁨이 승리하는 삶을 누릴 수 있다. J Owen은 ‘죄를 죽이라 그렇지 않으면 죄가 네 기쁨을 죽이리라’고 했다. 이를 위해 육을 좇는 ‘왜’의 질문을 죽이며, ‘어떻게’의 질문을 살리자.
요셉은 억울하게 노예로 팔리고, 혹은 감옥에 갇힐 때마다 ‘어떻게’의 질문을 살리며 존귀한 예언이 성취되길 바라며 맡겨진 일에 충성했다. 특히 사탄이 주는 세상의 거짓된 기쁨 곧 Joy Killer를 멀리할 수 있었다. 그는 젊은이의 성욕을 자극하는 가정주부와 관계를 끊었다. 사탄은 신자의 믿음을 파괴하려고 금 송아지를 하나님의 대체물이라고 거짓 소개하며 유혹한다. 가짜 위조품들이 범람하는 때에 진짜를 즐기자. 주님과 그의 말씀을!
진품을 즐기려고 하면 하나님께서 주도권을 가지시고 기쁨을 주신다. 항상 기뻐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기도의 내용을 가다듦어 주신다. 그리고 범사에 감사하는 풍성을 베푸신다. 기쁨은 기도 및 감사와 더불어 일하며 고통중에 더욱 풍성히 드러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