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는 자식에게 끊임없이 주고 또 주려한다. 지난 번 딸 집 갈 때는 김치와 미역국을 잔뜩 가져가더니 이번에는 오이무침과 콩국을 한 봇따리 챙겼다. 내리붓는 부모의 사랑 속에서 쏟아 부으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을 연상한다.
장로교 신앙의 선배들은 그 사랑을 TULIP(튜립)으로 요약했다. 전적으로 타락하여 스스로의 힘으로는 구원 받을 수 없는 우리를(Total Depravity=전적타락), 아무 조건없이 천국 자녀로 선택하셔서(Unconditional Election=무조건 선택), 제한된 수의 자녀들을 구원으로 이끄시되(Limited Atonement=제한된 속죄), 거절할 수 없는 은혜를 계속 베푸셔서(Irresistible Grace), 어떤 환경에서도 인내하도록 이끌어 주신다(Perseverance of the Saints =성도의 인내).
각양 좋은 것들을 아낌없이 쏟아 부어주시는 하나님은 광야길의 인도자로서 죄악의 감옥에서 건져주시며, 질병의 고통에서 건져주시며, 광풍의 절망에서 함께 하시는 위로자로서 붙잡아 주고 계신다. 분명 신앙의 철이 들어갈수록 받은 은혜를 더욱 감사하며 우리 자신도 사람들에게 베풀려 한다. 주는 자의 삶을 살려고 하니 자연스럽게 검소한 삶을 살게 된다. 검소(thrifty)의 반댓말은 인색(miserly)이며, 인색의 비슷한 말은 사치이다.
한 푼을 아끼며 검소하게 사는 목적이 자기만을 위하며 베품이 없다면, 그는 바로 인색한 자가 된다. 그러나 검소의 목적이 베품에 있다면 결코 인색한 자가 아니다. 은사 오종덕 목사님은 참으로 검소한 분이시다. 구두 한 켜레, 양복 한 벌을 아끼며, 길가의 쇠붙이를 주으시는 등 검소의 삶을 사시며 만든 1억원을 고신대 체육관 건축헌금으로 드리셨다. 반석의 한 할머니는 어렵게 살면서도 생명보험 만 불의 수혜자로 교회를 지명하셨다.
때때로 검소와 사치의 구분이 애매하다. 2만불 미만의 차량을 가지면 검소이고, 그 이상이면 사치인가? 결코 아니다! 어떤 경우에도 베품의 목적이 없이 살면 인색이요 사치이다. 거지 나사로가 머물던 그 대문의 주인은 부자요 늘 잔치하는 자였다. 그러나 베품이 없기에 철저히 인색한 자이다! 천국백성의 모습이 아니다.
- 박성만 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