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평화를 주셨다. (누가복음 19:38-42 )
예수님이 평화를 주셨다.
오늘은 예수님이 십자가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 무리들이 종려가지를 들고 환영한 것을 기념하는 종려주일이다.
종려주일에 우리는 여러 가지 의미를 생각할수 잇으나 예수님이 평화의 왕으로서 우리에게 평화를 주신 것을 생각하려고 한다.
우리에게 가장 귀중하고 가치있는 것은 마음의 평화다.
오랜전에 세계적인 각계 대표 저명한 인사들이 모여서 가장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토의했다. 돈, 명예, 건강, 지식, 권세... 여러 가지들이 대두 되었으나 결국 그들은 “평안” 이 가장 귀중하고 가치있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우리가 모든 것을 다 가져도 마음의 평화가 없으면 가진 것을 아무것도 누릴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최고로 값진 평안을 어디에서 얻으며 어떻게 얻을수 있는가?
돈을 주고 평안을 살수 있는가? 평안 하기로 결심한다고 되는가?
평안학교 라는 것이 있어서 거기에 등록을 하고 배운다고 되는가? 아니다.
평안은 오직 하나님이 주셔야 한다. 하나님은 평강의 근원이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평강을 주시기 위해 그 아들을 보내셨다.
예수님은 이 땅에 나실때도 평강의 왕으로 나셨다.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 천군천사들이 노래하기를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했다.
예수님은 죽으러 가실 때도 평강의 왕으로 가셨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죽으시기 위해 마지막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내용이다.
예수님께서는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다.
예수님께서 걸어가시지 않고 나귀를 타신 것은 지금 왕으로 자신의 도성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것임을 간접적으로 선포하신 것이다.
무리들도 예수님이 비록 군마는 아니었으나 나귀를 타고 입성하셨기 때문에 그를 왕으로 환영했다.
그들은 심지어 겉옷을 벗어서 예수님이 타신 나귀가 밟고 갈수 있도록 길에 깔기도 하고
손에는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왕으로 환영하며 노래했다.
38절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그들은 자신들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33년 전에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 천사들이 불렀떤 노래를 부른 것이다.
성령께서 그 무리들의 입을 빌어서 평화의 왕의 입성을 노래하게 한 것이다.
그 때 바리새인들이 불만을 토했지만 예수님은
만약 그들이 노래하지 않으면 돌들이 노래할 것이라고 하셨다.
그렇다. 평화의 왕으로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돌들도 만물도 노래했을 것이다.
이 모든 일은 구약에서 스가랴 선지를 통하여 예언하신 대로였다.
스가랴 9: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그러나 그 무리들은 참된 평화를 알지 못했다.
예수님이 평화의 왕으로 유대인에게 정치적 평화를 주실 줄로만 알았따.
그 기대가 이루어지지 않자 오히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 소리 질렀다.
그래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성 가까이 오셔서 그 성을 보시며 우셨다.
눅 19:42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번 하였거니와 지금은 네 눈에 숨기웠도다"
그 결과 AD 70년에 예루살렘이 멸망햇고 수많은 유대인들이 처참하게 죽었다.
참된 평화를 알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불행인가?
그들 눈에는 숨기워졌던 참된 평화가 오늘날 우리에게는 밝히 알려진 것을 감사하자.
1. 예수님이 참 평화를 주셨다.
요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 참 평안은 예수님 자신의 평안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평안을 우리에게 주시려고 하셨다.
그냥 우리 마음을 좀 편안하고 누그러지게 하는 정도가 아니다.
예수님 자신의 평안, 곧 존재적인 평안을 우리에게 주시기 원하셨다.
예수님은 우리를 지옥형벌에서 구원해 주실뿐 아니라 자신이 가지신 모든 좋은 것을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하신다.
마치 부모가 사랑하는 자녀에게 자기의 가진 모든 것을 줄수만 있다면 다 주고 싶어 하는 것처럼-
삼위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자신의 기쁨도 영광도 부요도 평안도 주시기를 원하신다.
아주 간절히 원하신다.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고 하셨다.
세상의 평안은 일시적이고 조건적이다.
조건적이기 때문에 그 조건이 없어지면 누리지 못한다.
건강을 잃거나 돈을 잃거나 명예를 잃거나 관계가 불편해지면 누리지 못한다.
일시적이기 때문에 돈이 생겨도 명예를 얻어도 오래 가지 못하고 곧 평안이 없어진다.
예수님은 우리 마음을 좀 편안하게 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의 평안을 주신다.
우리 존재 자체를 평안의 사람이 되게 하시고 예수님의 평안을 주신다.
* 죄를 용서하시므로 평안을 주신다.
죄인에게는 평화가 없다.
죄인은 언제나 그 마음이 불안하고 눌리고 두려울 뿐이다.
죄인은 죄의 용서를 받고 죄 사함을 받을 때만이 평안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할수 없는 이 죄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독생자를 보내셨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므로 죄의 값을 다 지불해 주시고 죄를 끝내 주셨다.
우리 죄 값을 지불해 주시기 위해 찔리시고 상하시고 채찍 맞으시고 징계를 받으셨다.
심지어 하나님께 버림받는 징계가지 받으셨다.
*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에게 평화를 주셨다.
이사야 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자신의 평화를 주시기 위해 대신 값을 지불하셨다.
이제 우리는 이 사실을 믿기만 하면 죄를 다 용서하시고 죄에서 자유함을 주셔서
우리로 평화를 누리게 하신다.
더 이상 죄에서 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지 않고 평화를 얻게 된다.
더 이상 죄인이 아니오 의인이 되었으므로 평화의 사람이 된 것을 믿어라.
*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심으로 평화를 주셨다.
[고후5:18]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하나님과 불화 한 자에게는 평화가 없다.
인관 관계도 불화한 상태에 있을때 마음에 평화가 있는가?
부모와 불화한 자녀에게 평화가 있겠는가?
하물며 하나님과 불화한 자에게 평화는 절대로 있을수 없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는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케 하셨다.
하나님과의 화목한 관계가 회복된 당신은 평화의 사람이 이미 되었다.
* 자유하는 아들이 되게 하셔서 평화를 주셨다.
종에게는 평화가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당신을 죄의 종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바꾸어 주셨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죄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유하는 아들이다.
우리가 율법을 지키는 것도 더 이상 종으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 자유하는 아들로 지키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도 더 이상 종으로 섬기는 것이 아니라 자유하는 아들로 섬기는 것이다.
아들은 종이 갖지 못한 자유함이 있다.
자신이 자유하는 아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때 평화를 누리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제 자녀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다.
우리가 무엇을 하기 때문이 아니라 자녀이기 때문에 사랑을 받는다.
혹 잘못할 때가 있을지라도 자녀이기 때문에 여전히 사랑을 받는다.
부모는 자녀가 잘 할 때는 기쁨을 가지고 사랑하고 잘못 할 때는 아픔을 가지고 사랑한다.
어떤 경우에는 잘못하고 넘어지는 자녀가 더 애절하게 사랑을 쏟을 때가 잇다.
하나님은 자녀인 우리를 어떤 경우에도 사랑하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잘못했을 때는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 때문에 회개하고
돌아서면 된다.
우리는 자녀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후사가 되었다.
아무 일한 것이 없이도 하나님께 의로 여김을 받은 자녀의 행복을 누려라.
아무 일한 것도 없는데 자녀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엄청난 복을 받았다는 것을 잊지 말라.
자유하는 아들이니 평화의 사람이 되었다.
2. 평화의 사람으로 살아라.
이사야 26:3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당신은 존재적으로 평화의 사람이 되었으니 이제는 평화를 누리며 살아라.
평화의 사람이 되었어도 주님을 늘 의지해야 평강을 누릴수 있다.
주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평강에서 평강으로 누릴수 있다.
* 하나님과 화평하게 살아라.
하나님과 화평하게 살기 위해서는 성령 안에서 살아야 한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해결하시고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케 하시고 우리를 자녀 삼으셔서ㅏ
우리에게 근본적인 평화를 주셨다.
그러나 그 분이 이루신 이 모든 것을 성령으로 실제적으로 성령을 보내셔서 누리게 하신다.
당신이 육을 좇아 살면 자동적으로 범죄하게 되고 죄의 종인것처럼 살게 된다.
그러나 성령을 좇아 살면 자유함을 누리게 된다.
하나님의 영이 있는 곳에는 자유함이 있다고 했다.
당신은 성령이 주는 마음으로 살아라.
성령이 주시는 마음은 두려워 하는 마음이 아니오 강하고 담대한 마음이다.
당신은 성령이 주시는 지혜로 살아라.
성령이 주시는 지혜는 화평함과 거룩함이 동반한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면 받을수록 성령이 주시는 기쁨과 평화와 자유함을 누리게 될 것이다.
* 다른 사람과도 화평하게 살아라.
하나님은 다른 사람들과도 화평하게 사는 것을 기뻐하신다.
그래서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라 하셨다.
엡 2: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 졌느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를 가깝게 하는 능력이 있다.
유대인과 이방인을 가깝게 만들어 주셨고
백인과 유색인종을 가깝게 만들어 주셨다.
모든 신분을 초월해서 형제와 자매가 되게 해 주셨다.
지식수준이나 생활환경이나 성격의 차이도 다 초월하게 해 주신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함을 받은 형제요 자매가 된 것을 귀중히 여겨야 한다.
하나님과 화목하게 지내기를 원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과도 화목하게 지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화목케 하는 직책을 주셨다.
당신이 다른 사람과 화목하게 살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화목하게 살수 있도록 만들어 주어야 하는 직책까지 주신 것이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다.
당신이 화목케 하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당신이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흐뭇해 하실 것이며 세상 사람들도 당신이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화평해야 하나님과의 관계도 화평하게 살 수 있다.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 매일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고 하셨다.
당신이 다른 사람과 마음이 통해야 하나님과도 통할수 있다.
하나님은 자신과 화평하기를 원하시는 것 만큼 다른 사람과도 화평하게 살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너희가 예물을 드리다가 형제화 불화한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두고 가서 먼저 형제화 사화 한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하셨다.
이만큼 형제와 화목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다.
형제와 화목하는 것은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것이 아니다.
형제와 화평하게 살기 위해서는 당신도 예수님을 본받아 화목제물이 되어야 한다.
자신이 죽지 않고는 다른 사람과 화목하게 살기는 어렵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평화의 사람으로 만들어 주셨으니 평화의 사람으로 살아라.
그러나 염려와 근심과 두려움이 올 때가 있다.
그럴 때 염려와 근심을 믿음으로 물리쳐라.
성령의 능력으로 물리쳐라.
마귀는 주님이 주신 평안을 빼앗으려고 염려와 근심과 두려움을 준다.
그러나 때로는 성령님이 주시는 근심도 있다. 이는 우리 영혼을 위해 유익하다.
때로는 성령께서 근심하게 하며 불안하게 함으로 주님의 뜻을 구하게 하시고 깨닫게 하시고
바른 길로 인도하신다.
그러므로 그럴 때에는 조용히 성령님께 물어보라.
성령님이 깨닫게 해 주시는대로 순종하면 다시 주님의 평안을 누리게 된다.
지금 여러분 중에 불안하고 두려운 분이 있는가?
지금 수치심, 자격지심, 후회와 회한, 으로 불안한 분이 있는가?
그런 자신을 성령님께 내어놓고 성령님이 다스려 주시기를 구하고 기다리라.
오늘도 좋으신 주님은 불안한 영혼에게 평안을 주신다.
예수님이 참 평화를 주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