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한 부활절에 두 분의 러시아 목사님이 그레이스 교회를 방문하셨다가, 반석교회까지 찾아 오셔서 피차 감사의 교제를 나누었다. 그러나 제 마음 깊은 곳은 세상을 곧 떠나실 병상의 어머니로 말미암아 짙은 구름이 끼어있었다. 어머니는 지난 30년 가까이 외아들을 그리워하셨으며, 임종 3년 반은 노환으로 고통을 겪었다. 그날 오후에 한국에 나가서60일간시어머니를 돌보던 아내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내는 병상의 어머니 귀에 전화를 대어 드렸고, 어머니와 나는 함께 대화하며, 기도하며 눈물겨운 작별인사를 했다: “하늘에서 곧 뵈요!” 두 시간 후에 어머니는 떠나셨다. 사실 컬럼버스에서 떠나 어머니 집에서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하며 마지막 인사를 하고 싶었다. 어머니의 가시는 마지막 순간만은 어머니 곁에 있고 싶었다. 그와같이 죽음은 나를 괴롭게 하며 어머니를 덮쳤다.
죽음은 늘 우리 곁에 있다. 쟌 칼빈이 놀랐던 것처럼 인간은 장례식에 참석하여 누구나 죽는다는 현실을 보면서도, 놀라울 정도로죽음을 전혀 진지하게 생각하지 못한다. 칼빈이 살핀대로 몇 분 후에 죽는데도 불구하고 죽음을 잊어버리곤 한다. 그러나 삶의 어떤 순간은 죽음을 너무 두려워한 나머지 죽음에 대한 생각을 피할 수가 없다. 이같은 경우에 불완전하기는 하지만 부딪히게 될 죽음의 날을 헤아리기 시작한다: 하루하루를 살면서 마지막 숨을 몰아 쉴 그 날이 더욱 가까이 다가옴을!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이래로 비록 죽음을 의식하지 않을려고 해도 인간은 죽음의 그늘이 서서이 다가오는 가운데 살고 있다! 나의 교인들과 마지막 점심을 나눌 때가 있을 것이다. 내 손녀의 뺨에 마지막 뽀뽀를 할 때가 있을 것이다. 나의 사랑하는 자들과 마지막 저녁식사를 할 때가 있을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좋은 것들이 끝나는 순간이 다가온다. 안타까운 것은 죽음이 내가 원하는 시간에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끔찍하게도 죽음은 우리와 시간 약속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첫 번째 숨을 쉬는 순간부터 죽음의 시계는 채카채칵 움직이기 시작한다. 주님의 형제인 야고보는 이를 상기시켜 준다.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과연 너의 생명이 무엇인가?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이슬이 아닌가 (약 4:14)!”
신자된 우리에겐 이슬처럼 사라지는 마지막 순간이 다가왔을 때, 우리의 걸음걸음 졸졸 따라 다니던 죽음의 발자국 소리를 더이상 듣지 않으며 바로 그 때부터 영원히 살 것을 놀랍게 볼 것이다. “다시는 사망이 없으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라 (계 21:4).” 의 말씀이 성취됨을 놀랍게 볼 것이다. 우리의 죽은 뼈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는 성령께서 구원의 보증자가 되심을 놀랍게 볼 것이다. 새생명이 선포되어지며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던 성령께서 우리 죽을 몸도 살리심을 놀랍게 볼 것이다. (롬 8:11). 죽음이 피할 수 없도록 우리를 쏘아대지만 단지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관문일뿐이다. 죽음의 행렬은 단지 영원한 집에 이르는 여행의 한 길일뿐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주님께서 죽음의 세력을 이기셨으며 복음의 빛으로 생명과 영생을 가져오셨기 때문이다 (딤후 1:10).
죽음의 시간이 오고있다. 다음 장례식에 참여하면 이것을 기억하라. 죽음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성경의 약속들을 따라서 차분해지자. 당신의 죽음도 역시 다가오고 있다. 그러나 장사한지 사흘만에 무덤에서 부활하신 주님께서 마지막 끔직한 원수인 죽음을 멸망시킬 날이 또한 다가오고 있다 (고전 15:26). 죽었다가 이제는 살아계신 분께서 죽음의 열쇠를 가지고 계신다. 우리의 죽음은 확실하다. 당신 뒤로 다가오는 죽음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있는가? 전혀 두려워하지 말라 (1:17). 왜냐하면 죽음이 당신을 걸고 넘어진 후에 당신은 바로 그때부터 영원히 살것이기 때문이다. 죽음이 스쳐 지나가 없어지지만 신자인 당신은 결코 없어지지 않는다!
- 박성만 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