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위험에서 건져 주시는 주님의 영을 찬양한다. 육체를 보호하시며 영혼을 지켜 주셔서 교회로 나아와 신령과 진리로 예배드릴 수 있도록 인도하신 성령을 찬송한다. 지난 화요 아침 골목길에서 언덕진 큰 길로 우회전 할 때에 갑자기 트럭이 내 뒤에서 급 브레이크 밟는 삑 소리와 더불어 경적을 울린다. 화득짝 놀라 있는 힘을 다해 속도를 올리면서 뒷거울을 보니 큰 트럭의 앞면이 거울안에 가득찼다. 간이식 수술하셔야 할 집사님을 멍하니 생각하다가 정지 싸인에서 좌우를 제대로 안살핀듯 싶다. 다윗은 삼하 22장에서 원수의 위험으로 부터 건져주신 하나님을 시적으로 찬양하고 있다. 수많은 원수들 - 거인 골리앗의 하나님 모욕, 생명을 바쳐 충성했지만 도리어 자기를 죽이려는 사울왕의 질투, 정권에 눈먼 아들 압살롬의 잔인, 동족을 이등분 내는 시바의 반역 등 - 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을 노래한다. 다윗이 부르짖을 때 땅이 요동치는 지진, 하늘의 기초가 흔들리는 듯한 천둥과 번개, 흑암과 바람을 동반한 태풍 등을 화살삼아 원수를 무찌른 것으로 노래한다. 그런데 주님은 드라마틱하게 다윗을 건지셨던가! 아니다. 자연의 신비로운 현상이 아니라 물맷돌, 깊은 잠, 불레셋 군대, 요나단 등으로 건지시지 않았는가! 그러면 왜 그렇듯 묘사할까? 첫째, 자기를 구원하신 분은 자연의 모든 현상을 다스리시는 전능자이심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리라. 둘째, 전능자는 자기 백성을 초자연적 방법으로 구원하실 때도 있지만 아주 일반적인 방법으로 건져주심을 알리고 싶었기 때문이리라. 분명 하나님을 의지하는 다윗이 건짐받음의 기쁨을 누린 것처럼 주님을 사랑하는 우리도 똑 같이 원수들에게서 구원받음을 누리고 있다. 너무 특이한 방법이 아니라, 일상적인 방법으로 계속 건져 주시기에 느끼지 못할 때가 많다. 임마누엘을 약속하신 분은 세밀히 보살피면서 사고와 질병, 혈기와 게으름, 마약, 술, 노름, 포르노, 스크린 중독들에서 우리를 건져 주신다. 회개의 영을 부어 주셔서 눈물 콧물 흘리며 넓은 곳으로 벗어나게 하신다. 진리의 영을 충만하게 채워 주셔서 더러움에서 자유를 누리게 하신다. 밀까부르듯 주물럭거리는 사탄의 손 안에 있던 베드로를 끄집어 내신 주님이 우리를 건지시며 교회의 일꾼들로 우뚝 세워 주신다. 주님 피가 신자를 정죄에서 해방하며, 실제 의인으로 양육하신다!
- 박성만 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