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련을 축복의 기회로 삼아라.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녀들에게도 시련을 주실 때가 있다.
이는 시련을 통해서 영육간에 더 큰 축복을 주시기 위해서다.
그렇다고 시련이 자동적으로 축복이 되지는 않는다.
믿음으로 시련을 잘 이기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으로 변화되어야 축복이 된다.
욥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는 그것을 배울수 있다.
역사상 욥과 같은 큰 시련을 당한 사람은 없다.
또한 욥과 같이 시련을 통해서 큰 축복을 받은 사람도 없다.
성경은 욥이 동방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이었다고 하신다.
그는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였다.
또한 아들 일곱, 딸 셋에 재물이 아주 많은 큰 거부였다.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욥을 자랑하실 정도였다.
1:8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
사탄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욥이 아무 이유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이처럼 복을 주셨으니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이제 하나님의 손을 펴서 그의 소유물을 쳐 보십시오. 그러면 정녕 주를 대면하여 욕할 것입니다” 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탄에게 욥을 치도록 허락하셨다.
이에 사탄이 욥을 쳐서 전 재산을 다 빼앗았다. 도적맞고 불타고 그 많은 재산을 하루에 다 잃었다.
또한 열 자녀들이 한 집에 모였을때 대풍을 일으켜 집이 무너지므로 열자녀들이 한꺼번에 다 죽었다.
이 큰 시련을 당하고 욥이 한 말을 들어보라.
“내가 모태에서 빈 손으로 나왔은즉 또한 빈 손으로 돌아가올지라
주신자도 여호와시오 빼앗아 가신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을지니이다.“
참으로 욥은 고난 가운데서도 믿음을 지켰다.
사탄은 욥을 더욱 괴롭게 하려고 그의 몸까지 쳐서 발바닥에서 머리 끝까지 악창을 나게 했다.
욥은 방안에 있지도 못하고 헛간에 내려가서 기와 조각으로 그의 가려운 몸을 긁고 있었다.
그의 아내가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했으나 욥은 그래도 믿음을 지켰다.
“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하면서 이 모든 일에 입술로 범죄치 아니하였다.
욥이 당한 고난의 소식을 듣고 그의 세 친구들이 그를 위로하기 위하여 찾아왔다.
그러나 욥의 곤경이 너무도 심한 것을 보고 울기만 하고 칠일동안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욥이 먼저 입을 열어 자기의 당한 고난을 한탄하자
그들은 하나님이 죄가 없는 사람을 치시겠느냐? 하면서 오히려 욥을 정죄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그들과 욥 사이에 긴 변론이 오갔다.
아마 친구들 때문에 욥은 더욱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욥은 재산도 다 잃고, 열 자식 다 잃고, 건강 잃고 친구들도 비판하고 정죄하는 자들이 되었다.
욥의 시련이 이처럼 컸으나 그 시련이 욥에게 축복의 기회가 되었다.
1. 더 큰 믿음을 얻는 축복의 기회로 삼아라.
42:1 “주께서는 못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
욥은 갑자기 그 큰 시련을 당했을 때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찬송하며 믿음을 지켰다.
그러나 욥의 믿음은 시련을 통해서 점점 커졌다.
우리의 믿음이 이만하면 크다고 생각할지라도 우리의 믿음은 더 커져야 한다.
시련을 통해서 더 큰 믿음을 얻는 축복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욥의 믿음은 더 깊어져서 구속주를 바라보며 부활에 대한 믿음도 가지게 되었다.
19:25-26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욥은 자기를 위해 대속주가 계시는 것을 믿었고 그 분이 이 땅에 오실 것을 믿었다.
당시 그가 이런 믿음을 가질수 있었던 것은 너무도 놀라운 믿음이다.
자기가 죽은 후에는 육체 밖에서라도 하나님을 보게 될 것을 믿었다.
부활의 믿음을 이미 그 때 가졌다.
그의 믿음은 점점 더 커져 갔다.
23:10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고 했다.
하나님이 내 인생을 길을 다 게획하셨고 하나님이 알고 계시고 인도하고 계신다.
하나님이 나를 단련하시는 목적은 나를 정금같이 만들기 위해서다고 깨닫고 고백하고 있다.
욥은 드디어 시련을 통해서 신앙의 정상에 이른다.
42:2 “주께서는 못하실 일이 없아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옵니다.”
믿음의 최절정은 자신을 온전히 버리고 주님만 의지하는 것이다.
자신의 뜻을 온전히 버리고 주님의 뜻대로 될 것을 믿는 것이다.
주님의 뜻이 나에게 아픔과 시련이라도 아멘으로 화답하며 받아 드리는 것이다.
오늘 우리도 시련을 만났을 때 믿음으로 이길뿐 아니라 더 큰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든지 전능하신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대로 이루실 것을 믿어야 한다.
2. 더 깊은 영적인 사람이 되는 축복의 기회로 삼아라.
38:1-2 ” 그 때에 여호와께서 폭풍우 가운데에서 욥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욥은 시련 가운데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다.
하나님은 욥을 위로하신 것이 아니라 책망하는 말씀을 하셨다.
하나님은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고 책망하는 말씀으로 시작하셨다.
지금까지 친구들과 변론할 때 욥이 한 말들은 너무도 바른 말, 옳은 말이었고 진리의 말들이엇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 라고 책망하셨다.
우리가 지식적으로 하나님에 대해서 안다고 하는 것이 이처럼 수준 낮은 미련한 말이 될 수 있다
하나님이 책망부터 하시므로 그의 혼미한 영과 생각을 깨우쳐 주셨다.
혼미한 것을 일깨우는데 있어 때로는 한 마디의 책망이 열 마디의 권면보다 효과적일수 있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계속해서 너는 내가 묻는 말에 대답하라고 하시면서 질문을 하셨다.
38:3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말에 대답해 보라.“
38:4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욥은 하나님의 질문에 한 마디도 대답할수 없었다.
하나님이 질문하신 내용들은 욥의 영적 수준으로서는 알수 없었고 대답할수도 없는 말씀들이었다.
그 말씀들은 하나님이 알게 해 주실때만 알수 있는 말씀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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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책망과 질문의 말씀을 들으면서 욥의 견고한 자아가 깨어졌다.
욥의 영적 수준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데서 새롭게 시작된다.
하나님을 바로 알려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성령의 조명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성령님은 진리의 영이시다.
성경 말씀을 깨닫는 것도 성령께서 깨닫게 해 주실 때 만이 바르게 깨달을수 있다.
욥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자신의 무지를 고백했다.
42:3 “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입니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욥은 비로소 자신이 옳다고 했던 모든 말들이 무지한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욥은 도리어 하나님께 묻게 된다.
42:4절 “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는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이처럼 우리도 옳다고 해서 말하고 주장하지 말고 무의 상태에서 하나님께 묻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럴 때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된다. 하나님을 아는 깊이가 영적 수준이다.
* 하나님의 실존을 경험하는 기회가 되었다.
5절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가 눈으로 주를 뵈옵는 다고 한 것이 어떤 일이었는지 모르나 분명한 것은
그가 하나님의 실존을 경험한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때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진짜 알게 된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때 하나님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분이며 거룩한 분인가를 알게 된다.
하나님의 임재 안에 머무는 것이 차원 높은 영적 수준이다.
3. 더 의로운 사람이 되는 축복의 기회다.
6절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 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 회개하나이다.”
* 하나님의 실존을 경험한 후 에 달라졌다.
하나님의 실존을 뵙기 전 까지는 그는 자신이 의로운 줄 알았었다.
그것은 그가 친구들과의 변론에서 자신의 순전함과 의로움을 변증하고 있는 것을 보아서 알 수 있다.
그는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은 적이 없는 거룩한 삶을 살았으나 그것 마져도 하나님의 거룩한 실존 앞에서 하잘것없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의 거룩한 실존 앞에서 의롭기는커녕 오히려 더러운 자신을 발견하였다.
그리하여 재와 티끌 가운데서 탄식하며 회개하였다.
이사야도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는 선지자였으나 하나님의 실존 앞에서 자신의 더러움을 인하여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도다” 라고 고백했다.
욥은 자신이 한 말을 거두어 들인다고 했다.
욥이 거두어 들인 말들은 주로 친구들과 변론하면서 한 말들이었다.
그가 한 말은 오늘날 신학적인 입장에서 볼 때도 틀린 것이 없는 옳은 말이요 진리의 말이다.
그러나 욥은 하나님의 실존을 경험하고 난 후에 하나님은 신학에 가두어 둘 분이 아님을 경험적으로 직관적으로 알게 되자 그는 자신의 한 말들이 합당하지 않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전하기 위해서 늘 주석을 통해 점검하고 기도하면서 주님의 뜻을 점검하려고 애 쓴다.
그래도 때로는 내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부끄러운 것이 없을가? 두려워질 때가 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한 말이 옳은 것 같아도 하나님이 어떻게 생각하실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인간적으로나 성경적으로 옳은 말이라도 하나님이 옳게 보시지 않는 것이 있을수 있다.
하나님은 욥의 세 친구가 한 말을 책망하셨다.
7절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 말씀을 하신 후에 여호와께서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와 두 친구에게 노하노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르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옳지 못함이라.”
하나님은 욥의 말이 옳다고 하시면서도 이치를 알지 못하는 무지한 말을 했다고 책망하셨다.
이제 욥의 세 친구에게는 내게 대해서 한 말이 옳지 않았다고 책망하셨다.
신학적으로 생각하면 그들의 말도 다 옳은 말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까닭없이 너에게 고난을 주셨겠느냐고 말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욥에게 그들이 생각하는 그런 이유가 있어서 고난을 허락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실 귀한 목적, 더 큰 축복을 주시기 위한 것이었는데 욥의 세 친구는 그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말했다.
오늘 우리도 그와 같은 실수를 할 때가 있다.
다른 사람에게 성경적으로 옳게 말한다고 해서 다 옳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행하실 어떤 일이 잇는 것을 알지 못하고 함부로 말하다가
하나님의 책망을 받을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며 말해야 한다.
욥은 하나님의 실존을 체험하고 전혀 새로운 영적 차원에 이르게 되었다.
진정한 부흥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영광스러움을 깨닫는 동시에 자신의 추함과 부족함을 깨닫고 회개하는 데서부터 일어나게 된다.
* 진정한 사랑의 사람이 되었다.
8절 “내 종 욥이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것인즉 내가 그를 기쁘게 받으리니 너희가 우매한 만큼 너희에게 갚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은 욥의 세 친구들을 책망하시면서 그들이 욥에게 기도를 받아야 용서해 주시겠다고 하셨다.
하나님은 욥으로 하여금 진정한 사랑을 베푸는 자가 되게 하시기 위하여 그를 정죄하고 괴롭혔던 세 친구를 위하여 기도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다.
사랑의 절정은 원수를 위해 진심으로 기도하는 것이다.
욥은 인생의 전반기에서도 사랑을 많이 베푸는 삶을 살았었다.
그는 먹을 것이 없는 자를 보면 먹여주었고 옷이 없는 헐벗은 자를 보면 입혀 주었고 거처가 없는 자에게는 거처가 되어 주었었다.
그러나 그것이 사랑의 전부는 아니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랑은 원수까지 용서하고 그를 위해서 축복하는 것이었다.
예수님의 사랑의 절정은 갈보리 십자가 위에서 보여주셨다.
죄인을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서 대신 저주를 받으시면서 죄인들을 용서해 주시기를 기도 하셨다.
우리가 구제를 좀 한다고, 좀 선을 베풀며 사랑을 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전부인양 생각하면 안 된다. 우리는 더 높은 사랑을 하는 자리로 나아가야 한다.
4. 더 큰 축복의 기회로 삼아라.
10절 “욥이 그의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전 모든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
욥이 세 친구를 위하여 기도하매 그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갑절의 축복을 주셨다.
이것이 하나님이 축복하는 순서이기도 하다.
먼저 영적인 축복을 주시고 곤경을 돌이키시고, 그 다음 육신의 축복을 주신다.
* 시련을 끝내 주셨다.
하나님은 욥의 곤경을 돌이키셨다고 했다. 하나님은 욥의 곤경을 끝내 주셨다.
시련은 영원하지 않다. 지금 시련을 겪고 있는가? 하나님이 끝내 주실 것을 믿어라.
도저히 끝이 없을 것 같은 욥의 시련도 끝내주셨다면 여러분의 시련도 끝내 주실 것을 믿어라.
* 갑절의 축복을 주셨다.
물질을 갑절을 주셧다 자녀도 열 자녀를 더 주셨다.
먼저 천국에 가 있는 자녀들과 합해서 갑절의 자녀를 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물질은 갑절을 주시면서 자녀는 열명만 다시 주신 것을 통하여
우리의 자녀들이 혹시 먼저 갔다고 해서 결코 자녀를 잃어버린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여전히 우리의 자녀이며 하나님께서도 count 하고 계시다는 것을 더욱 확실히 깨닫기 바란다.
오늘 우리도 다 크고 작은 시련을 당한다. 이 시련이 축복의 기회가 될 수 있다.
시련을 축복의 헤랄드 로 삼을수 있다. 시련을 축복의 기회로 삼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