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 : 담임목사 서삼정
본문말씀 : 잠언 1:23-33
재앙에서 살 길 잠언 1:23-33
재앙에서 살 길에 대해서 말씀을 전하려 한다.
누구나 이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는 세계적인 재앙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우리는 이 재앙을 무사히 피하려고만 해서는 안 된다.
이 재앙의 때에 개인적으로는 물론 국가적으로 시대적으로 영적인 각성을 하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그러면 재앙이 오히려 축복의 기회가 될 것이다.
지난 달 워싱톤 Examiner 에 나온 전국 여론 조사에서 미국 전체 국민의 거의 절반은 코로나 바이러스가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보내시는 wake up call 이라고 믿는다고 했다.
또한 1/3 은 성경에서 말씀하신 말세의 재앙으로 본다고 답했다.
민주당에 소속한 사람들의 41%, 공화당 소속한 사람들의 58% 가 자신을 너무 세상적이라고 생각하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코로나 바이러스 위기를 통하여 미국의 영적 대각성이 일어나게 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기독교인 아닌 비기독교인 중에서도 22 % 나 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새롭게 진리를 갈망하며 하나님께 돌아갈수 있는 최고의 시기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 참으로 감사하다.
오늘 본문은 재앙의 때에 살 길을 말씀하고 있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책망을 듣고 돌이켜야 산다.
23 “나의 책망을 듣고 돌이키라. 보라 내가 나의 영을 너희에게 부어주며 내 말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 책망을 들어야 산다.
요즈음은 어른도 아이도 책망 듣기를 싫어한다.
좋은 말, 귀에 달콤한 말만 들으려고 하지 책망을 하면 잘 듣기는커녕 멀어지고 돌아서려고 한다.
그러나 성숙한 신앙인은 하나님의 책망의 말씀을 단 마음으로 받는다.
책망을 받는 태도는 신앙의 성숙도뿐 아니라 인격의 성숙도를 보여주는 것이다.
본문에서 하나님은 책망을 들으라고 하시면서 여러 가지로 책망을 하셨다.
먼저 18- 19절에서는 다른 사람을 해하려는 마음과 악한 행동을 책망하셨다.
그리고 남을 해치는 자들이 결국은 자신을 해친다고 하셨다.
다른 사람은 배려하지 않고 내 마음 내키는 대로만 사는 것은 이기주의요 육체주의다.
존 파이퍼 목사는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 시대의 도덕적 타락을 그림처럼 나타내 보이셨다고 했다.
이 시대의 사람들이 얼마나 육체주의에 빠져서 살아가고 있는지를 우리는 보아야 한다.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이 얼마나 육체주의자로 살아왔는지를 깨달아야 한다.
육체주의는 단순히 도덕적 타락만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내 감정과 기분을 따라 살고 내 유익만 추구하는 것이 다 육체주의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야지 육체의 소욕이나 내 입장이나 내 감정을 따라 살아서는 안 된다.
성경의 역사는 사람들이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살 때마다 하나님이 재앙을 내리신 것을 볼 수 있다.
소돔과 고모라가 그 대표적인 것이다.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살았던 소돔과 고모라를 하나님은 유황 불로 심판하셨다.
인류의 역사도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살면 재앙을 받은 것을 보여준다.
우리는 봄베이 최후의 날 영화를 통해서 그것을 잘 알고 있다.
이 시간에 우리를 책망하시는 하나님의 책망의 음성을 심각하게 들어야 한다.
자신이 얼마나 이기주의 인지, 얼마나 육체주의 에 빠져 있는지 깨달야 한다.
20-21 절에서는 하나님의 지혜에 대하여 거역하고 불순종하는 자들을 책망하셨다.
하나님의 지혜의 말씀을 업신여기는 것이 얼마나 큰 죄인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지혜의 말씀을 업신여기는 것은 하나님 자신을 업신여기는 것가 같다.
하나님의 지혜의 말씀대로 살지 않고 불순종하는 것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도덕적인 잘못은 큰 죄로 여기면서 그보다 더 큰 죄인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는 것은 보통으로 생각한다.
여러분, 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두렵게 받고 있는가?
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적으로 순종해야 된다고 생각하며 듣고 있는가?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두렵게 받아드리고 절대적으로 순종할 각오를 가지고 들어야 한다.
우리가 그렇게 신앙생활 하지 못했다면 돌이켜야 한다.
22절 에서는 어리석은 자, 거만한자, 미련한 자를 악한 것으로 책망하셨다.
어리석은 자는 알지 못하는 자다.
하나님의 지혜의 말씀이 얼마나 복된 것을 알지 못하는 자다.
거만한 자는 하나님 없이도 살 줄 아는 자들이다. 자기 마음대로 사는 자다.
이련 자들이 미련한 자요 악한 자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원이다.
반면에 어리석은 자는 하나님이 없다고 한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이 없다고는 하지 않는다.
그러나 실제 삶에서 마치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할 때가 많지 않는가?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것처럼 조그마한 일에 낙심하지 않는가?
하나님이 계시지 않고 보시지 않는것처럼 내 마음대로 행동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어리석은 자요 거만한 자들이다.
이 시간에 어리석고 거만한 것을 책망하시는 하나님의 책망을 잘 들어야 한다.
* 돌이켜야 산다.
책망을 받은 후에는 돌이키는 행동이 뒤따라야 한다.
돌이키는 것은 행동을 말하는 것이다.
책망을 듣기만 하고 돌이키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돌이키기를 원하면 내가 돌이켜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알고 하나 하나 실천해야 한다.
우리는 회개 할 때 입술로만 할 때가 많다. 또는 감정적으로만 할 때가 있다.
회개는 입술로, 감정적으로 해야하지만 거기에 멈춰서는 소용이 없다.
그러면 마음이 점점 굳어져 버린다.
예를 들어 형제를 용서하라고 말씀하실 때 마음에 찔리면 회개하고
실제적으로 형제를 찾아가서 그의 손을 잡아야 한다.
예를 들어 부모님 사랑에 대한 말씀을 들으면 곧 실천해야 한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 드릴 헌신과 물질에 대해서 말씀을 들으면 곧 순종해야 한다.
만약 감동이 되는데도 순종하지 않으면 마음이 굳어져 버린다.
그래서 다음에 그런 말씀을 들어도 마음이 굳어져서 더 이상 감동도 되지 않는다.
말씀을 들어도 성령의 감동이 없으면 너무나 큰 불행이요 큰 재앙이다.
회개할 때 철저하게 돌이키자.
하나님이 돌이키라고 하신 것은 완전히 바뀌라고 명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돌이키라고 하신 것은 철저하게 방향을 바꾸라고 명하시는 것이다.
만약 책망을 받고도 돌이키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를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2. 책망을 받지 않고 돌이키지 않으면 살 길이 없다.
24-25 절 “내가 불렀으나 너희가 듣기 싫어하였고 내가 손을 폈으나 돌아보는 자가 없었고 도리어 나의 모든 교훈을 멸시하며 나의 책망을 받지 아니하였은즉”
* 하나님의 책망을 받지 않으면 살 길이 없다.
하나님의 책망을 받아야지 안 받아도 되는 것이 아니다.
책망을 받아드리지 않으면 재앙에 버려두신다.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의 책망을 잘 받지 않는다.
하나님의 책망을 자신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잘 받지 않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언제나 내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내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을 때 진지하게 받아야 한다.
그렇지 않고 흘러버리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업신여기는 태도가 된다.
* 돌이키지 않으면 살 길이 없다.
오늘날 목회자들이 가장 실망하는 것 중의 하나가 성도들이 말씀을 듣고도 돌이키지 않고 변화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은 돌이키지 않는 자를 어떻게 하시겠는가?
하나님은 언제까지나 그냥 보고 계시지 않는다.
책망을 받지않고 돌이키지도 않는 자에 대해서 어떻게 하시는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보라.
26절 “너희가 재앙을 만날 때에 내가 웃을 것이며 너희에게 두려움이 임할 때에 내가 비웃으리라.”
우리가 재앙을 만날 때에 하나님이 긍휼을 베풀지 않으시고 오히려 비웃으신다고 하셨다.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하나님이 진노 중에 우리를 버려두시는 것이 무서운 형벌이다.
하나님은 돌이키는 자에게 진노 중에도 긍휼을 베푸신다.
그러나 끝까지 돌이키지 않는 자에게는 긍휼을 베푸시지 않는다.
그런 자에게는 오히려 재앙을 더 급속히 강하게 내리신다.
27절 “너희의 두려움이 광풍 같이 임하겠고 너희의 재앙이 폭풍같이 이르겠고
너희에게 근심과 슬픔이 임하리니
재앙이 광풍과 같이 임한다고 하신 것은 신속하게 임한다는 말씀이요
감당할수 없게 임한다는 말씀이다.
이런 재앙이 임하는 것도 두려운 일인데 더 두려운 것은 하나님이 외면하시는 것이다.
27절 “그 때에 너희가 나를 부르리라. 그래도 내가 대답하지 아니하겠고 부지런히 나를 찾으리라. 그래도 나를 만나지 못하리니.“
가장 큰 비극은 하나님이 외면하시는 것이다.
가장 큰 비극은 회개할 기회를 놓진 것이다.
회개할 기회를 놓치면 하나님을 불러도 대답지 아니하신다.
돌이킬 기회를 놓지면 우리가 하나님을 부지런히 찾아도 만나지 못한다 하셨다.
회개할 기회를 놓친 에서는 자손 대대로 저주를 받았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히12:17]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그가 그 후에 축복을 이어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나는 이 말씀을 생각할 때마다 에서에 대한 연민이 일어난다.
그리고 자신을 좀 더 채찍질 하지 않을수 없다.
재앙의 때에 살 길이 없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죄를 범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끝까지 돌이키지 않기 때문이다.
29절 “대저 너희가 지식을 미워하며 여호와 경외하기를 즐거워하지 아니하며 ”
단순히 하나님의 지식의 말씀을 듣지 않는 것이 아니라 미워하기 까지 한 자에게 재앙을 거두지 않으신다.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경외하기를 좋아하지 않는 자는 재앙을 면치 못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는다는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어떻게 들려지는가?
오늘 우리는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있는가?
오늘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을 즐거워하고 있는가?
오늘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것을 즐거워하고 있는가?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말슴대로 사는 것을 즐거워하고 있는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모든 것보다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모든 은혜는 하나님을 즐거워할 때 주신다.
끝까지 돌이키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책망을 업신여기는 것이다.
30절 “나의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나의 모든 책망을 업신여겼음이니라.”
오늘날 우리는 돌이키지 않는 것을 보통으로 생각할 때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돌이키지 않는 것을 하나님의 책망을 업신여기는 것이라고 하셨다.
이는 곧 하나님을 업신여긴다는 말씀이다.
우리가 누구의 말을 업신여긴다면 그 사람을 업신여기는 것과 같다.
하나님을 업신여긴다는 것은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
우리가 재앙을 받는 것은 돌이키지 않는 결과요 열매다.
31절 “그러므로 자기 행위의 열매를 먹으며 자기 꾀에 배부리라.”
하나님이 재앙에 버려두시는 것은 그 원인이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다.
재앙을 받는 사람에게 있는 것이다.
32절 “어리석은 자의 퇴보는 자기를 죽이며 미련한 자의 안일은 자기를 멸망시키려니와”
그러나 돌이키는 자는 재앙을 면케 하신다.
3. 책망의 말씀을 듣고 돌이키면 재앙의 때에도 평안하게 하신다.
33절 “ 오직 내 말을 듣는 자는 평안히 살며 재앙의 두려움이 없이 안전하리라.”
* 돌이킨 자는 두려움이 없다.
믿는 자는 죄가 있을 때 두려움이 온다.
그러나 죄를 돌이킨 후에는 두려움이 없어지고 담대함을 얻는다.
더욱 하나님에 대한 믿음, 하나님의 보호하심에 대한 확신이 생긴다.
91:1-7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하며 전능자의 그늘 아래에 사는 자여,
나는 여호와를 향하여 말하기를 그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내가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이는 그가 너를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심한 전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
그가 너를 그의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의 날개 아래에 피하리로다 그의 진실함은 방패와 손방패가 되시나니
너는 밤에 찾아오는 공포와 낮에 날아드는 화살과 어두울 때 퍼지는 전염병과 밝을 때 닥쳐오는 재앙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천 명이 네 왼쪽에서, 만 명이 네 오른쪽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하지 못하리로다
* 돌이킨 자는 평안히 살수 있다.
돌이키는 자는 단순히 재앙을 피하게만 하시는 것이 아니다.
평안히 살게 해 주신다.
요즈음 우리는 밤에 잘 때 항상 찬송가 “예수가 거느리시니” 를 듣다가 잠 든다.
예수가 거느리시니 즐겁고 평안하구나 / 주야에 자고 깨는 것 예수가 거느리시네
주 날 항상 돌보시고 날 친히 거느리시네 / 주 날 항상 돌보시고 날 친히 거느리시네
재앙 중에도 살 길이 있다. 우리가 살 길은 코로나 vaccine 이 아니다.
우리가 살 길은 하나님의 책망의 말씀을 잘 듣고 돌이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의 거느리심과 다스림 가운데 평안하게 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