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는 천국에서 영생을 누리도록 부름받은 자들이다. 한 뼘에 불과한 짧은 인생이 신자의 바라는 모든 것이라면 성도는 뭇 사람 가운데 더욱 불쌍한 자이다(고전 15:19). 그러나 길, 진리, 생명되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게 되었고, 그분이 준비하신 집, 곧 우리 아버지의 집을 영원하도록 소유하게 되었다.
첫 부활의 열매되신 주님 안에서 영생의 집을 누리게 되었다. 아마 새 옷 입으면 세 번을, 자동차 사면 세 달을, 집을 사면 삼 년을 즐기겠지만 자녀들은 아버지 집에서 영원히 즐기게 되었다.
영생을 누릴 자들에 대한 아버지의 최대 관심은 닮은 꼴 작업이다. 아버지 자신이 거룩하신 것 처럼 그의 자녀들도 날마다 거룩해 지기를 바라신다. 유일한 비결은 말씀과 기도이다 (딤전 4:5), 아버지의 말씀에 헐떡이며, 아버지와 말씀통한 기도의 인격적 교제안에서 되어진다. 주님과 의 그말씀에 헐떡이는 신령한 부흥의 바람이 불기를 기도한다. 주님에 대한 매력을 세상은 철저히 빼앗아 가려 한다. 유롭의 경우 대형 교회들은 텅텅 비나 축구장들은 꽉꽉 채워진다. 반석의 경우 때마다 공간이 채워지니 감사할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긴장의 끈을 늦출 수 없기에 금식하며 “1-17 및 후손들이 말씀에 헐떡이게 하소서!"라고 기도한다. 히브리서의 수신자들이 예수의 복음에 대한 매력을 잃으며, 유대주의의 천사, 모세, 아론 등의 제사장들에게 관심을 기우리는 위기 속에서, 예수님만이 우리가 믿을 주님이시요 우리를 온전하게 하시는 존재임을 강조한다. 그분만이 천사, 선지자, 모세, 여호수아, 아론 보다 비교할 수 없이 더욱 뛰어난 분이심을 설명한다. 너희가 자랑하는 믿음의 선진들도 예수님을 바라보며 말씀을 약속을 "바라는 것들의 실상으로" 붙잡았기 때문에 그리 되었다고 한다.
그러기에 가장 매력적인 그분만이 우리가 바라보며 따라갈 대상이다. 이것이 분명하지 못하면 쉽게 낙심할 수 밖에 없다 (12:3). 강퍅해지다가 (3:13), 심지어 타락할 수도 있다 (6:5). 천국의 영광 상급을 분명히 믿어야 한다 (11:6). 예수님이 십자가의 수치를 개의치 않으시고 감당할 수 있었음은 “그 앞에 있는 기쁨”이었다. 곧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심”이었다. 성부와 하나되어 우주의 온전한 통치권의 위임을 받으심이었다 (칼빈). 신자가 당하는 고통을 거룩에 이르는 훈련으로 여길 때 영광 상급을 미리 맛본다. 신앙이 자라나는 의의 체험과 세상이 줄 수 없는 평강을 맛본다.
- 박성만 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