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며,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을 자연스럽게 속삭이는 자들은 하늘의 영광스런 교제를 즐기는 자들이다. 그 이름 때문에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혹은 수 많은 성도들을 형제 자매라고 부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교제를 만드시기 위하여 세 직분을 감당하시되 피 흘리기까지의 수고하신 예수님 덕분이다. 사실 우리가 도로와 공원, 도서관과 박물관들을 알차게 즐기게 됨은 국민들이 땀의 열매로 드린 세금 덕분이다. 누릴 것을 알차게 누림이 삶의 지혜이다.
5월의 신선한 공기를 누리며, 화려한 물감으로 채색된 석양을 즐기자. 메모리얼 연휴에 여행을 떠나는 4천만 명중의 하나가 아니더라도 집 앞의 연두색 잎들과 뒷 마당위에 높이 떠 있는 별들을 음미하면 어떨가! 그리고 육체의 아픔으로, 마음의 상처로 아프신 분들을 혹은 떠남의 불안으로 설레이는 자들을 기도의 가슴으로 안으면
어떨가!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는 예수님의 약속을 구체적으로 누릴 수 있지 않겠는가! 강림하시고 승천하신 분의 만물을 충만케 하신다는 약속을 누리지 않겠는가!
그분은 약속을 수행하기 위해 성령님을 보내셨다. 성령님을 통해 그분의 신성과 인성을 충만히 누리게 된다. 곧 전인격적인 교제를 휴유증 없이 가지게 된다. 사람과 사람의 교제 속에는 아무리 사랑스런 존재라 할지라도 절제가 필요하다. 경제 생활의 열심에도, 휴가와 운동을 즐김에도, 애완견과의 교제속에도 절제가 필요하다. 그러기에 주의 영께서는 우리에게 사랑, 희락, 화평, 인내, 자비, 양선, 충성, 온유의 열매를 잘 누리며 휴유증이 없도록
마지막 열매인 절제를 주셨다. 진실로 매사에 절제가 필요하다!
지난 주일의 안수 및 임직예배에서 “이제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축사의 한 구절이 계속 심령속에 맴돈다. 130분의 예배를 드리기까지 임직자들과 더불어 온 성도들의 많은 수고가 들어갔다. 이 예배가 하나님나라 확장의 시작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해냈다”라고 하는 자세의 절제가 필요함을 실감한다.
다윗은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언약궤를 그곳에 안장하면서 통일의 대업을 이룬 어느 초저녁에 음행을 시작으로 직권 남용과 살인까지 범했다. 죄악의 시작을 멈출 수 있는 절제의 능력이 심히 아쉽다!
그 뒤안길에 “내가, 내가, 내가 노력하여 권세를 가졌다”라는 오해와 교만이 뒤덮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도 지금까지 지내온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며 안수예배후 하나님이 하시는 시작의 손길을 주시하자! 매사에 절제하면서! 수요 찬양과 성경학교의 모습속에서 응시하며 손 길을 붙잡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