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일 : 2021년 3월 21일
설교자 : 담임목사 서삼정
본문말씀 : 누가복음 19:35-44
설교자 : 담임목사 서삼정
본문말씀 : 누가복음 19:35-44
예수님이 우리에게 평화를 주셨다. 눅 19:35-44
예수님이 우리에게 평화를 주셨다.
오늘은 종려주일에 전할 말씀을 전하려고 한다.
종려주일은 예수님이 평화의 왕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날을 기념하는 주일인데 시간적으로는
다음 주일에 해당한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던 길에 벳바게와 베다니 마을에 이르렀을 때였다.
벳바게와 베다니는 예루살렘 근처 감람산 기슭에 있는 서로 인접한 마을이다.
예수님께서 두 제자를 맞은편 마을로 보내시면서 아무도 타지 않은 어린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서 끌고 오라. 만일 누가 왜 푸느냐고 묻거든 “주님이 쓰시겠다” 고 대답하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자기를 위해 준비된 나귀새끼가 거기 메여 있는 것을 다 아셨다.
제자들은 말씀대로 건너 마을에 가서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고 풀어서 끌고 오려고 했다.
나귀의 주인이 어찌하여 푸느냐 물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주께서 쓰시겠다고 했더니 나귀 주인은 순순히 허락했다.
예수님은 나귀새끼를 준비해 두셨을뿐 아니라 그 주인의 마음도 다 준비해 놓으신 것이다.
오늘도 주님은 자기 일을 위해 사람도 물질도 다 준비해 놓고 계신다.
또한 주님을 위해 바칠 마음도 준비해 놓고 계신다.
예수님이 우리의 진정한 주인이시다.
우리도 주님이 쓰시겠다고 하실 때 우리 자신뿐 아니라 우리가 가진 물질, 재능, 건강, 시간을 기꺼이 드려야 한다.
* 주님의 쓰심이 복이다.
예수님께 쓰임 받은 그 나귀 새끼와 그 주인은 큰 복을 받았다.
평강의 왕이 입성하시면서 타셨으니 얼마나 복인가?
그 일은 그 때 이후 2천년이 넘도록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전해질 것이다.
예수님을 태우고 가는 나귀도 얼마나 영광스러웠는가?
예수님의 제자들은 나귀 새끼 등에 겉옷을 벗어서 깔고 예수님을 태우고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길에 겉옷을 벗어서 깔았다.
예수님을 태운 나귀 새끼는 그 위를 걸어서 입성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사람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입성했다.
예수님은 예언대로 평화의 왕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다.
예수님은 평화의 왕이시다.
이사야 9:6 “... 평강의 왕이니라 할 것이니라.”
예수님의 탄생을 예언한 이사야는 예수님은 평강의 왕이시라고 예언했다.
예수님은 평강의 왕이시다.
예수님은 존재적으로 평화의 왕이시다. 예수님은 평화의 근원이시다.
예수님의 평화는 세상의 평화와 다르다.
세상의 평화는 조건이 좋을 때 조금 누릴수 있는 것이다.
그러다가 조건이 바뀌면 곧 평화를 잃게 된다.
또 세상의 평화는 일시적인 평화기 때문에 조건이 바뀌지 않아도 그 평화가 오래 가지 않는다.
예를 들어 가난하던 자가 돈이 생기면 마음에 여유도 있고 평화를 누리는 것 같다.
그러나 돈은 쉽게 없어질수도 있고 또 없어지지 않아도 그 평화가 오래 가지 않는다.
예수님의 평화는 그런 것이 아니라 존재적인 평화요 근원적인 평화요 본연의 평화다.
본연의 평화는 하나님이 가지신 평화요 범죄하기 전 아담이 누렸던 평화다.
예수님의 평화를 받으면 조건을 뛰어넘어 누릴수 있는 근본적인 평화다.
세상 평화는 나라가 안정되고 전쟁이 없고 가족들이 다복할 때 누리는 평화다.
그러나 예수님의 평화를 받으면 전쟁터 한 복판에서도 누릴수 있고
투병하는 침상에서도 누릴수 있고, 가난의 밑바닥에서도 누릴수 있는 평화다.
예수님은 자신의 그 평화를 우리에게도 주시기 원하셨다.
예수님은 우리 마음을 조금 편하게 해 주는 정도가 아니라
자신의 그 놀라운 평안 자체를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하신다.
[요14:27]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예수님은 그 놀라운 자신의 평화를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 탄생하셨고
그 평화를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평화의 왕으로 입성하셨고
그 평화를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화목제물이 되셨다.
다 같이 해 봅시다. “예수님은 평화의 왕이시다.”
예수님은 평화의 왕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다.
38절 “이르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 구약의 말씀대로 이루어진 일이다.
스가랴 9: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500 여년 전 스가랴 선지를 통하여 예언하신 대로 예수님은 입성하셨고
그 예언대로 무리들은 크기 기뻐하며 환영했다.
마태복음에서는 구약의 그 말씀을 이루시기 위해서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21:3-5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하나님은 예언의 말씀을 이루시기 위해 나귀도 준비하셨고 또 나귀 주인이 순순히 그 나귀를 내어드릴수 있도록 그의 마음까지 준비하셨고 또 무리들로 하여금 예언하신 말씀대로 찬양하며 환영하게 하셨다.
* 예수님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시다.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은 구약에서 예언하신 바로 그 왕이라는 뜻이다.
이는 바로 메시야 라는 뜻이요 예언하신 왕이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왕이시다.
예수님께서 왜 나귀를 타고 입성하셨을가?
갈릴리에서부터 그 먼 길을 걸어오셨으면서 왜 성에 들어가실 때는 걸어가지 않고 나귀를 타셨는가?
이는 예수님이 왕으로서 왕의 도성인 예루살렘에 입성하신다는 것을 선포하고 계신 것이다.
예수님은 탄생하실 때도 유대인의 왕으로 나셨고 십자가에 죽으실때도 죄 패에 유대인의 왕 이셨다.
예수님은 지금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으로 입성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지금 예루살렘에 입성하지시만 그러나 주님의 죽음은
패배가 아니라 승리요 끝장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셔 만왕의 왕으로 등극하시는 과정이었다.
그들이 겉옷을 깔고 영접한 것도 왕에 대한 예우였다.
스가랴서는 예수님께서 왕으로 입성하시는 것을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스가랴 9:9-10 “..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의 정권은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
우리 주님의 통치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를 것이다.
예수님은 영원히 다윗의 보좌에 앉아서 다스릴 왕이시다.
예수님은 예언된 왕이시여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시다.
우리도 다 같이 그 왕을 찬송하자.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 예수님은 평화의 왕으로 입성하셨다.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예수님은 군마를 타고 입성하신 것이 아니라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셨다.
이는 그가 겸손하신 평화의 왕이신 것을 나타내신다.
무리들은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시는 것을 보면서
“하늘에서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 하면서 찬양했다.
놀랍게도 이 찬양은 33년전에 예수님께서 베들레헴 마굿간에 탄생하셨을 때 천사들이 불렀던 노래와 일치한다.
누가복음 2장에서 그 때 천사들이 한 노래를 보자.
눅 2:14 “하늘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지금 예수님을 환영하는 무리들이 그 때 천사들의 찬양을 들은것도 아닌데 어떻게 그렇게 일치하는 찬양을 했을가? 성령님이 하신 것이다.
성령께서 그 무리들의 입을 빌어서 예수님 탄생때 불렀던 천사의 노래를 부르게 함으로 지금 예수님께서 평화의 왕으로 입성하시는 것을 노래하게 하셨다.
그 때 바리새인들이 불만을 토했지만 예수님은
만약 그들이 노래하지 않으면 돌들이 노래할 것이라고 하셨다.
그렇다. 평화의 왕으로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돌들도 만물도 노래했을 것이다.
3. 예수님이 우리에게 평화를 주셨다.
41-42절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번 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 예수님이 주시는 평화를 알아야 한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사 그 성을 보시고 우셨다.
이 장면을 생각해 보라. 사람들의 환영과 찬양을 받으시며 가시던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을 때 성을 보시고 갑자기 우셨다.
조금 눈물을 흘리신 것이 아니라 소리 내어 우셨다.
왜 우셨는가? 그 성이 평화에 관한 일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예루살렘 이라는 말은 살렘 곧 평화라는 뜻을 가진 위대한 왕의 성읍이다.
그럼에도 예루살렘은 평화를 알지 못했다.
인간은 범죄하면서부터 하나님과 원수되었고 그러면서 평화도 잃었다.
죄는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한다.
하나님과 원수 된 자에게는 평화가 없다.
여러분이 누구와 원수된 상태에서 평화를 누리지 못하는 것을 경험했을 것이다.
하물며 창조주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어찌 평화를 누릴수 있는가?
예수님은 평화를 회복해 주시기 위해 지금 입성하고 계셨다.
십자가에서 자신을 화목제물로 내어주시려고 지금 입성하고 계셨다.
그러나 그들은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을 알지 못했다.
* 평화를 알지 못하면 저주가 있다.
43-44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평화을 알지 못하면 무서운 저주가 있다.
예수님은 평화를 알지 못하는 그 세대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을 내다보시며 우셨다.
저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 하면서 그의 피 값을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리소서 했다.
저들이 말한대로 그들과 그 후손들이 무섭게 그 피 값을 지불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지 40 여년 후인 AD 70년에 예루살렘은 로마군들에 의해 포위당했다.
난공불락의 요새라고 생각했던 예루살렘이 결국 그들에 의해 처참하게 무너지고 성전도 돌 하나도 돌 위에 겹쳐지지 않고 완전히 무너졌다.
마침 유월절기였기 때문에 각 곳에서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다.
그래서 무려 110 만여명이 처참하게 죽었다.
아이들을 땅바닥에 던져서 죽이고 임신한 부녀자들은 배를 갈라 죽였다.
예루살렘 성 거리마다 피가 시내같이 흘렀다고 한다.
평화를 알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가? 그러나 이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평화에 관한 것을 알지 못한 그들이 받을 영원한 심판에 비하면 이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예수님은 그들이 마지막 날 받을 영원한 심판까지 내다 보면서 더욱 가슴 아파서 우셨던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아도 되고 몰라도 되는 것이 아니다.
평화에 관한 일을 알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이면 이 상황에서 예수님이 우셨을가?
* 우리도 울어야 한다.
44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으로 인함이라 하시니라
“보살핌을 받는 날” 은 바로 오늘이다.
오늘이 은혜의 때요 오늘이 구원의 날이다.
오늘이 평화의 왕을 알아야 하는 날이다.
내 자녀, 가가운 사람들이 아직 평화의 왕을 알지 못하면 우리도 울어야 한다.
자녀가 멸망으로 가는 것을 보고 훈계만 해서 안 된다.
울어야 한다. 예수님도 우셨는데 우리가 얼마나 울어야 할가.
* 예수님이 우리에게 평화를 주셨다.
엡2:16-17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예수님이 우리 대신 화목제물이 되심으로 우리에게 평화를 주셨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므로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시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화목제물이 되심으로 유대인과 이방인을 한 몸이 되게 하시고 다 함께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다.
가까이 있는 유대인들에게나 멀리 있는 이방인들에게 평화의 복음을 전해 주셨다.
* 예수님은 이 평화를 믿는 자들에게 주셨다.
눅2:14“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 이미 천사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에게 평화라고 노래했다.
땅에서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누구인가?
하나님이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한 사람들이다.
우리가 예수 믿는 것은 우리 힘으로 믿는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셔서 믿게 하신 것이다.
예수님이 행하신 모든 일은 다 우리를 위해서 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기 위해 평강의 왕으로 이 땅에 오셨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기 위해 평강의 왕으로 입성하셨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기 위해 화목제물이 되셨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기 위해 성령을 보내사 예수 믿게 하셨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평화를 주셨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