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는 여주와 같다. 아주 쓰디쓰지만 건강에 아주 유익하기 때문이다. 여주의 쓰디쓴 것이 당치료와 장수에 유익하듯이 예레미야가 죄악을 쓰드쓰게 드러내며, 잔혹하게 심판받을 수 밖에 없다는 쓰디쓴 설명이 하나님 사람의 거룩과 선행에 유익하다. 여주의 혜택을 누리려면 맛이 없어도 복용해야 하듯이, 예레미야의 혜택을 누리려면 지각을 사용하여 꾹 참고 복용해야 한다.
유대는 선민이라고 하면서도 하나님을 멸시하여 우상을 섬겼을 뿐만 아니라 약한 자들을 무고히 짖밟았다. 약한 자의 대명사인 고아와 과부를 돌보기는 커녕, 조금 있는 것들을 착취했고 법정에서 거짓 고소의 잘못된 증거를 대면서 죄없는 피를 흘렸다. 우상숭배원인은 광야생활을 끝내고 가나안에 정착하면서 점차 혼합주의라는 늪에 빠져 들었기 때문이다. 풍요와 다산의 신이라는 바알 숭배를 하나의 문화의식 혹은 여호와 신앙의 보층으로 여겼다.
유대는 골짜기에 길이 날 정도로 열심히 산당을 찾아 풍요제의를 드렸지만 바알들의 뒤를 따르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특히 재앙이 닥치면 구원의 청탁을 성전에서 드렸기에, 여호와를 버린 것이 아니라고 여겼다. 하나님을 떠난 적이 없다고 백성은 주장하지만, 예레미야는 백성이 우상숭배를 저지르고 있다고 외치니, 그들의 눈에는 그가 선지자 행세하는 미친 놈에 불과했다. 과연 우리는 돈을 하나님으로 섬기는 우상숭배의 죄를 우리는 저지르지 않는가?
유대는 언약궤가 있는 예루살렘 성전이 구원을 보장해 주기에 성전밖에서의 윤리적 삶은 관심에서 조금씩 멀어져 갔다. 성전 밖에서 약한 자들을 짖밟아도 의인이 되고 싶으면 성전에서 합당한 제물을 드리면 됐다. 성전은 값싸게 의로와지려는 자들로 넘치며 도적의 소굴이 되었기에, 그는 외쳤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물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 순종하는 삶이라고! 그런데 어떤 자가 약자착위의 죄악을 깨닫고 고치며 약자의 이웃이 되었던가!
행위언약을 통해 스스로 구원받을 자가 없기에 돌비에 새긴 것이 아닌 마음에 하나님의 법을 새긴 언약을 맺으셨다. 그 언약 덕분에 불순종과 무능력에서 해방되어 시대의 가치관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 몸을 산 제물로 드리는 거룩한 삶을 살게 되었다. 지어져가는 성전으로서 강대국 아닌, 우주의 왕을 의지하며 회복과 존귀의 삶을 살게 되었다. 여호야긴의 높아짐을 보라!
- 박성만 목사 -